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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동으로부터 조마면 방면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신안1리, 죽정마을이 있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죽정리로 불렸는데 1914년 인근의 신동, 구미, 지동, 신하, 안서, 신기, 신촌을 통합해 신동(新洞)의 신(新)자와 안서(安棲)의 안(安)자를 따서 신안동(新安洞)이라 했다가 1962년 죽정을 신안1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사간원승지(司諫院承旨)를 역임한 성산배씨 10세손 배한(裵閑)의 차남 진사 배윤순(裵允詢)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등 충신들을 주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세상을 한탄하며 식솔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안새래로 낙향해 입향조가 되었다. 뒤에 후손들이 1890년(고종27년) 죽정으로 이주한 후 성산배씨 신안파가 대대로 집성을 이루어오고 있다.
죽정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배상유(裵尙유)라는 후손이 정착한 이래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다하여 죽전(竹田)이라했고 또 감천변에 대나무가 많다하여 물가정(汀)자를 써서 죽정(竹汀)이라 했다고 한다.
죽정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신안2리는 중동과 뒤주골 두 마을로 나뉘어 있다. 화순최씨 12세손 최세영(崔世英)이 조선 명종 때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최씨 집성촌을 이루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중동은 마을 앞 큰들의 귀퉁이에 마을이 있다하여 들귀미라 부르고 한자로 구미(龜尾)라 적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마을이 유실되고 현재의 위치에 새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큰들 중앙에 마을이 있다하여 중동(中洞)이라 했다고 한다.
중동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한지골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뒤주골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풍수지리로 볼 때 곡식을 저장하는 뒤주와 같이 움푹 패였다하여 뒤주골이란 지명을 얻은 것이라고 마을주민 이용호(52세)씨가 전한다.
한지골과 뒤주골에서 중동을 거쳐 감천으로 연결되었던 제방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 꿈틀대며 흘러간다하여 용제방(龍堤防), 후룡(後龍)으로 불렸다는 이 마을의 방천은 1970년대 경지정리 와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 신하리(新下里)또는 내신(內新)으로 적고 안새래로 불린 신안3리는 마늘산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만력골짜기 입구에 마을이 있다하여 만력동(萬曆洞)으로도 불렸다.
새래라는 지명은 새신(新)의 변음으로 보이며 1658년(효종9년) 성산배씨 배금겸(裵今謙)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성산배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안쪽에는 배흥립(裵興立)삼대(三代)정려각이 섰는데 1617년(광해군9년)사별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경주김씨부인과 이순신장군의 선봉장으로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아들 배흥립, 병자호란 때 공신이 된 손자 배명순(裵命純)등 3대에 걸쳐 정려가 내렸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신하(新下), 안서(安棲)로 불렸는데 1914년 인근마을과 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신안동으로 개칭되고 1962년 밧새래, 안서동, 저목골이 신안4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연산군때 형조참의와 전라감사를 역임한 화순최씨 10세손 최중홍(崔重洪)의 손자인 최세영(崔世英)이 선조때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최씨 집성촌을 형성했다.
안서(安捿)라고하는 지명은 화순최씨 일가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편안하고 살기좋은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며 편안할안(安)자와 머무를 서(棲)자를 써서 안서동(安棲洞)이라 했다고 하며 화순최씨 집성촌답게 선조를 제향하는 남애정(南厓亭)가 백원당(百源堂)이 세워져 있다.
백원당 옆으로는 화순최씨 가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선조를 추모하기위해 설립했다는 구제서원(懼齊書院) 터가 남아있다.
밧새래라는 지명은 입향조 최세영이 내려와 새로 정착했다하여 새신(新)에 아래하(下)자를 써서 신하(新下)라고 했는데 이 마을이 신하로 통칭되는 마을의 외곽에 있다하여 외신(外新)이라 적고 바깥신하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밧새래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뒤 영탑골로 불리는 골짜기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1호인 고려시대 양식의 거대한 석불이 감천을 굽어보고 섰다.
이 불상은 사찰이 폐사된 후 땅속에 묻혀있다가 밭을 일구던 중 발견되어 1987년 문화재로 지정되고 1996년 현재의 보호각이 설치되었다.
마을주민 최도식(62세)씨에 따르면 1980년대 골동품 수집상이 불상을 가져가기 위해 없던 길까지 내가며 준비 하던 것을 주민들이 행정기관에 알려 반출을 막았다고 한다.
보호각에 불상이 봉안된후 뒤늦게 원래의 좌대(座臺)가 발견되어 뒤편에 자리를 지키고 있고 불상의 머리는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떼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조마면소재지로 향하는 지방도에서 안새래로 가기전에 위치한 마을로 지동, 새터, 새래숲 등 세 마을은 1962년 신안5리로 분동했다.
마을회관이 있는 지동은 마을 앞에 조선시대에 성산배씨 집안에서 주동이 되어 축조되었다는 큰 저수지가 있음으로 해서 못지(池)자를 써서 지동(池洞)이라 했다고 하는데 어조사 지(只)자를 써서 지동(只洞)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마을은 안새래와 밧새래에서 분가한 성산배씨와 화순최씨 일가들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고 주민 이기진(78세)씨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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